우리지역 이야기

구산리사지는 통일신라~조선시대 사찰, 금동불상 출토

초심방 2006. 11. 16. 16:49
구산리사지는 통일신라~조선시대 사찰, 금동불상 출토
지역 불교문화연구와 역사연구에 중요한 사료

 

김정 기자 jkim@uljin21.com

 

   
구산리 삼층석탑(보물 제498호)주변에서 통일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황동불상, 청동수저, 중국 송나라의 희녕중보(熙寧重寶)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돼 지역 불교문화 연구와 문화재 보존을 위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군은 지난 2004년 울진 구산리삼층석탑(보물 제498호)을 해체 복원한 후 후속사업으로 지난 6월 말부터 경주대학교 박물관을 조사단을 통해 이 일대 2천945㎡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금당지내 황갈색층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은 높이 8.5m로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의 수인(手印)과 통견(通肩)이며 연화대좌를 갖춘 반면, 얼굴은 일부 훼손돼 상호(相好)를 알아볼 수 없고 불두 뒤에는 광배꽂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사적지에서는 온돌건물지, 공방유구, 석열및 수혈 등 유구가 확인됐고,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 덧띠·줄무늬토기, 연화문수막새, 선조문평기 등과 고려시대의 자기, 중국 송나라 화폐, 조선시대 분청사기, 평기와 등도 함께 출토됐다.

이번 조사 결과 구산리 삼층석탑의 북쪽에 수혈, 금당지, 석열이 확인됐다. 수혈은 타원형인 길이 1.6m, 너비 1m, 깊이 25㎝이며 금당지는 동서 13m, 남북 10m의 긴 장방형의 건물지로 기단은 앞면 만을 다듬은 장대석을 건물의 전면(前面)인 남쪽에만 사용했다.

발굴된 유물중 금동불상, 인화문토기, 덧띠· 줄무늬토기, 연화문수막새 등의 출토로 미루어 절의 창건연도가 통일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해무리굽 순청자 압축양각 전접시 등의 자기와 중국 송나라 화폐인 희녕중보(熙寧重寶), 중국백자 등을 통해서 고려시대에도 절이 유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사대상 지역에서 현재 노출된 유구, 즉 금당지와 관련 유구들은 여기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와 평기와 등을 통해서 조선시대 초까지 이 절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강봉원 조사단장은 "구산리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기까지 존속했던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금당지 유구는 고려 혹은 조선시대에 개축, 중건돼 폐사(廢寺)까지 존속했던 건물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발굴 조사단은 11일 현지에서 발굴조사 지도위원회를 개최하고 현지설명회를 가졌다.

강봉원 발굴 단장은 “현재 조사대상구역내에 노출된 곳 뿐 아니라 현재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지역도 과거 사역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곳에도 사찰과 관련된 유구가 지하에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이들 지역에 대한 문화재의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영호 지도위원은 “성류굴의 최초 발굴당시 부처님의 손이 발굴된 것과 이 가람 터가 무관하지 않다”며 “구산리 3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적인 탑으로 이 탑을 보지 않고는 신라시대 탑의 맥을 이해 할 수 없는 만큼 울진군에서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지역의 타 문화관광자원과 연계한 개발의 가치가 충분한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고 평가 했다.
또 정 위원은 “이번 발굴은 시굴의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며 “지하의 또 하나의 기단과 민가가 자리 잡고 있는 남단의 추가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출신인 장헌덕 조사위원(문화재청 문화재관리위원)도 “발굴이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현장을 보존하고 보고서가 만들어진 이후 유적지의 보존 또는 복원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번 발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보고서가 작성되려면 1~2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이기간 동안 민간 소유의 부지를 매입 또는 임대형식으로 보상한 후 한 두 차례의 추가 발굴 작업이 진행될 전망이다.

   
   
11일 오후 구산리 3층석탑 인근에서 발굴사업단의 설명회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