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 십이령 - 트레킹코스
▒ 미역 소금 지고 넘던 꼬불꼬불 열두고개
구정을 하루 앞두고 간신히 취재 종점 광회리 외광비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 되어서였다. 이틀 낮동안 내리 걷고도 모자라 헤드랜턴까지 켜고 걸음을 재촉했던 십이령길의 강행군. 이번 호에 소개되는 취재 전반부인 새재까지는 아름다운 옛길의 정취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후반부 여정은 도배되다시피한 임도 사이에서 잘리고 남은 옛길을 찾느라 열 걸음 후퇴와 스무 걸음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후반부의 여정을 생각하면 다시 못 갈 듯싶었다. 적어도 취재 직후에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임도에 잠식돼가는 십이령의 현실이 오히려 옛길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름답고 걷기 편한 옛길만 기대하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옛길도 찾아내어 걸어넘기. 아무래도 옛길 걸어넘기에도 새로운 방식 하나를 추가해야 하리라. 십이령에 관해 귀띔한 이는 울진 부구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김경하씨(42세·백두대간식물탐사회)였다. 울진의 유일한 내륙 통로. 군수도, 과거 보러 가는 양반도, 보부상들도 모두 하나같이 넘던 곳. 그 중 십이령의 단골은 울진과 봉화 장을 오간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은 행상, 선질꾼이란 이름 외에도 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메고 다녀 이 지역에서는 주로 ‘바지게꾼’으로 불렸다. 바지게에는 소금, 미역, 생선 등 소박한 생필품들이 가득했고. 5만분의 1 지형도 〈죽변〉을 꺼내보았다. 그런데 ‘十二領’ 글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엉뚱한 곳에 박혀 있었다. 그후 십이령에 관해 수소문하는 동안 아리송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십이령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십이령에는 정작 ‘십이령’이란 이름의 고개는 없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 사이를 왕래하는 동안 넘어야 했던 열두 고개를 말한다. 열두 고개를 넘어야 울진이든 봉화든 닿을 수 있었으니 이 고장 사람들에게 십이령 그 자체가 울진과 봉화를 잇는 옛길 이름으로 정착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지도 제작자들이 십이령을 지형도에 제대로 표기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울진 울진장·흥부장, 봉화 내성장·춘양장을 오간 바지게꾼들이 3일 낮밤을 꼬박 걸어야 넘을 수 있었다는 십이령은 대략 150리길.
울진에서 줄곧 서남방면으로 달리는 십이령은 울진쪽에서 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에 이른 다음 봉화땅에 들어 고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 등으로 이어졌다. 36번 국도가 훼방놓는 봉화쪽과는 달리 울진의 십이령 옛길은 지금도 호젓하게 남아 있다. 새재나 낙동정맥의 한나무재 등 예나 지금이나 근접하기 힘든 높고 험한 고개들 덕분이었다. 보부상들의 집결지였다는 울진군 북면 두천 1리의 바깥말래에서 취재일행도 집결했다. 구정이 내일 모레인데도 옛길에 매료되어 이번 취재에 동행한 권택경씨(40세·태백 한마음산악회 등반대장)·김경하씨와 합류한 후 이 마을에 있다는 보부상 우두머리 반수(班首) 권재만(權在萬)과 접장(接長) 정한조(鄭韓祚)의 불망비(不忘碑)부터 찾아나섰다. 입춘 하루 앞둔 따뜻한 날. 때마침 내의 차림으로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있던 민가의 노인은 아이들이 썰매 타며 노는 계곡 건너편의 비각이 일행이 찾던 곳임을 알려준다. 노인은 올해 예순일곱살인 박장성씨였다. 박노인은 보부상들이 집결하던 이곳 바깥말래에 주막집이 세 곳 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그 중 하나라며 십이령 얘기를 풀어놓는다. “(바지게꾼은) 미역 소금을 사서 싣고 내성장까지 가는데 한 열명 스무명씩 모여 출발했지요. 해방 후부터 안 다녔어요. 저기 비각 앞으로 난 길이 십이령 가는 길입니다. 너블한재 넘으면 발현동(發現洞)인데 폐가 한 채가 있고 바린재(발재)가 바로 보입니다. 재에는 당집도 있고요. 그후로 계속 무인지경이지요. 요즘 성황당 보수공사중인 곳이 나오면 거기가 새재인데 여기서 새재 넘어 대광천까지는 족히 세 시간은 걸어야 해요.” 길을 자세하게 알려준 박노인과의 조우로 취재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오후 3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우선 하루를 접게 될 서면 소광리 대광천까지를 취재 전반부로 잡고 이후로는 다음날 걱정하기로 했다. 비각 안에 선 두 개의 철비를 훑어내린다.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 철비의 주인공은 보부상 회장격인 반수와 부회장격의 접장이고 모두 내성 출신이다. 새재 조령성황사 연대기록을 발굴한 임경희씨(영남대학교 한국정치사 교수)에 의하면 이들은 1910년대에 살던 사람이다. 보부상의 우두머리가 내성 사람으로 자기 고장의 바지게꾼들을 보호하려 한 것이니 그당시 소금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생필품이었나를 짐작케 한다. 비각 앞을 지나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언덕으로 길이 이어졌다. 효자각이 자리한 이 언덕에서 옛길은 등성이를 타고 희미하게 이어지다 버스도 다닐 만큼 넓은 임도와 합쳐졌다. 멀리 고갯마루에 선 당나무와 당집이 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단박에 ‘저것이 발재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발현동에 온 것이다. 발재에서 임도로 10여분 내려가니 간이창고가 놓여진 곳에서 십이령골이 합류하고 있었다. 옛길은 이제 십이령골 상류를 따라간다. 버들강아지에 물이 올라 살결이 보드라운 은빛이다. 계곡에는 눈과 얼음이 걸쳐져 있었지만 물살에서는 무거운 옷을 벗어버린 뒤의 가뿐함처럼 쾌활한 기운이 마구 전해져 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봄이 오고 있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모두들 외투를 벗어 배낭 속에 집어넣는다. 십이령골은 평화로웠다. 계곡과 옛길은 어느 쪽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사이좋게 이어졌다. 길은 평탄했고 간혹 나타나는 굴곡은 순하고 부드러워 걷는 이를 조금도 성가시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십이령골과 십이령 옛길이 어울린 아름답고도 적막한 여정은 무려 1시간 반 가량 계속됐다. 찬물내기를 지날 즈음 석양이 비쳐들었다. 발걸음을 서두른다. 곧게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U자형으로 홱 굽돌았다. 옛길과 이별하고 가파른 임도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고도가 순식간에 높아져 어느새 골짜기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대로 가면 임도 따라 일행은 대광천 상류까지 내려갈 것이었다. “이 놈의 임도는 도무지 재미가 없어요. 골짜기나 능선의 자연스런 선을 뻔히 놔두고 제멋대로 길을 내서 여기에 한번 붙잡히면 마냥 따라 걷게 되고 말아요”라며 수년간 호젓한 오지산행만 즐기고 있는 김부래기자가 싫증난 듯 한마디 한다.
다행히 일행은 그쯤에서 왼쪽 새재로 오르는 옛길을 발견했다. 작년 10월부터 70일 동안 울진 군청에서 새재의 성황당 복원공사를 했는데 목재를 나르기 위해 이 길목에 걸쳐둔 나무다리 덕분이었다. 새재 오르는 길은 점점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새재까지는 불과 10분 거리였지만 길이 가파르고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데다 눈까지 얼어 있어 조심스레 오르니 족히 30분은 걸린 느낌이다. 그렇게 오르는 동안 울진 사람들이 새재를 왜 십이령의 중심고개로 여기는지 저절로 수긍이 갔다. 보부상들이 한숨 지며 즐겨 부르던 노동요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 역시 이 대목에서 더욱 애절하게 불려졌을 듯하고.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넘고/꼬불 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새재에 당도한 일행은 그 옛날 나그네들도 그랬을 것처럼 인사를 올린다. 새재의 역사만큼이나 운명을 같이해 왔을 조령성황사. 성황사 기록을 발굴해 낸 임경희교수는 1868년 보수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이 성황사의 역사를 1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장구한 역사를 지닌 성황사는 불과 넉달 전 복원공사를 한다고 허물어졌다. 옛 향기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눈 앞에는 새기와와 콘크리트로 단장된(?) 건물 한 채가 서 있을 뿐이다. 기막힐 노릇이다. 160년 역사도 한순간 깡그리 사라질 수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라면. 대광천을 따라 후곡동 민박집인 남의석씨 댁에 든 것은 8시가 다 되어서였다. 취재 일행에게 “좋은 일 하십니다”며 말문을 연 남씨의 고무신 신고 새재 넘던 경험담과 춘양목 원산지로 유명한 이곳 소광리의 500년생 황장소나무 얘기 등으로 밤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남의석씨는 일행이 걸어야 할 십이령길을 마치 어제 다녀온 것처럼 낱낱이 설명해주고 있는데, 왜 눈앞에는 어둠 속에서 보았던 성황사가 자꾸 어른거리는지….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