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平海) 숭덕사(崇德祠) 춘향대제(春享大祭)
평해손씨(平海孫氏) 대종회 주관으로 경북 울진군 후포면 숭덕사(崇德祠) 에서 거행되는손씨시조(孫氏始祖)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에 대한 춘향대제(春享大祭) 입니다 숭덕사(崇德祠)에는 신라 흥덕왕때의 문효공 손순(孫順)과 順의 손자로 평해군에 봉해진 익담(翼淡) 그리고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하였고, 1269년(원종10) 임연(林衍)의 난(亂)에 공이 있어 기성후(箕城侯)에 봉(封)해진 손인량(孫仁亮)이 같이 배향되어 있습니다.
평해손씨 대종회는 현재의 후포면 후포리 산 20번지에 7번국도와 인접하여 부지 약 5천평 위에 도시조와 입향관조 그리고 고려국에서 중서문하성 평장사(中書門下省 平章事)로서 기성후(箕城侯)에 올랐던 평장사공 인량(仁亮)의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와 영모제(永慕齊), 그리고 평장사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비각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 평해 숭덕사(崇德祠) 영모재(永慕齋)
-소 재 지 :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 건축 구성 영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전면(前面)에 툇간을 두었으며,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은 2통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영모재 전면에 외삼문인 추원문이 있다. 4개의 기둥으로 받친 팔작기와지붕이다. 둘레를 시멘트 담으로 둘렀다,
건물은 계곡 안의 경사지에 터를 잡아 외삼문, 영모재, 숭덕전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주위로는 시멘트블록 담장을 둘렀다. 숭덕전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전면에 툇간을 둔 맞배기와집이다. 최근에 지중과 창호를 교체했다. 숭덕전에는 손씨시조(孫氏始祖)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 과 평해손씨 관시조인 손익담, 평해 손씨 중시조이자 고려조에서 기성후에 오른 평장사 손인량의 위패를 모셨다. 영모재 입구 좌측에 거북이 모양의 자연석에 ‘음덕(音德)’이라 각석한 조형물 1기가 세워져 있다. ▶문중이야기
울진지방 특히 평해지역의 토성(土性)인 평해황씨, 평해손씨, 평해구씨(丘氏) 중에서 한반도에 그 뿌리를 둔 토성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씨족이다. 평해손씨는 고래(古來) 신라의 6부 촌에 출현하는 영남지방 최고의 토종 성씨 중의 하나로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나타난다. 평해손씨는 손익담(孫翼淡)을 시조로 하고 평해를 본관으로 하는 울진군의 세거 성씨이다. 안동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경주손씨를 대종으로 하는 같은 연원의 분파를 이루고 있는데, 평해손씨도 그 한 계열이다.
평해손씨는 모든 손씨의 중시조인 손순(孫順)의 손자 삼 형제 가운데 둘째인 손익담의 후손이다. 손순의 첫째 손자인 손익감은 밀양손씨, 그리고 셋째인 손익원은 월성손씨의 시조이다. 평해손씨는 시조인 손익담이 신라 895년(진성여왕 9)에 평해군에 봉해지면서 입향하였다. 고려 원종 때 손인량은 문화시중평장사로 임연의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기성후에 봉해져 울진 기성으로 입향하였다.
손익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며, 언제 어떻게 평해군에 봉해졌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없다. 손익담의 아들 손경상(孫景尙)이 고려에서 나라에 공을 세워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손자인 손술조(孫術祖)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평해군에 봉군되면서 가세가 융성해졌다. 손도진(孫道津)의 아들 손기정(孫起貞)이 병부상서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고려 원종 때 임연(林衍)의 난을 평정한 손인량(孫仁亮)은 기성후(箕城侯)에 봉해졌으며, 평해손씨 문중에서는 손인량을 평해손씨 1세조로 인식한다. 손득부(孫得富)의 아들 손영(孫永)은 충숙왕 때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형조참판(形曹參判)을 지내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 받았다. 또 손밀(孫密)은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 받았으며, 그의 맏아들인 손인효(孫仁孝)는 단종 때 생원시(生員試)에 일등(一等)으로 올라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절의(節義)를 지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동방청절사(東方淸節士)’라 불렀다.
손순효(孫舜孝)는 세조 때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한(典翰) 겸 집의(執義)에 올라 17개 항목의 정책(政策)을 상소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으며, 특히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그 부당함을 극간(克諫)했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1487년(성종 18)에 『식료찬요(食療撰要)』를 찬진했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았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은 학자로 그림에도 뛰어나서 죽화(竹畵)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손순효의 아들 손주(孫澍)는 성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장령(掌令)과 정언(正言), 수찬(修撰), 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중종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고, 1521년(중종 16)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하존시사(賀尊諡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와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수(郡守) 손부(孫溥)와 호조참판(戶曹參判) 손식(孫軾), 참의(參議) 손윤선(孫胤善) 등이 유명했으며, 손몽열(孫夢說)의 아들 손필대(孫必大)는 인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공청도도사(公淸道都事)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난 시인으로 명망이 높았다. 손익담의 후손들은 가평공파(加平公派), 김천파(金川派), 녹정공파(祿井公派), 동정공파(同正公派), 부곡공파(富谷公派), 불이공파(不二公派), 옥강공파(玉江公派), 정충공파(貞忠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통진현감공파(通津縣監公派),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희질공파(僖質公派)와 북한 지역에 세거하는 다섯 파 등 여러 지파를 형성하였다. 평해손씨는 평해 학곡리, 후포 금음리, 기성 다천리, 온정 외선미리에 주로 세거한다.
▶관련인물
-손순(孫順)
공(公)의 휘(諱)는 순(順)이요 자(字)는 사구(士久)이시며 호는 문효공(文孝公)이시다.신라(新羅) 모량부(牟梁部) 사람 태자사인(太子舍人) 휘(諱) 학산(鶴山)의 아드님이다. 그리고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발(白永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취향산(醉香山) 아래에서 살으셨다.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가세(家勢)가 빈곤해지자 아내와 같이 품을 팔아서 어머님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 노모(老母)에게 드리는 음식을 매번 빼앗아 먹으니(每奪母食) 매우 민망하였다.
이에 백씨부인(白氏夫人)에게 의논하여 아해(兒孩)를 땅에 묻어버리고 효도(孝道)의 본분(本分)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니 부군(夫君)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 기슭으로 가 땅을 파니 삽 끝에 옥석(玉石) 소리가 나서 공(公)이 이상히 여겨 주위를 두루 파니 둥근 옥돌이었다. 석종이다. 시험삼아 두드리니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묻으려다 이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의 복이라 묻지 맙시다.” 했다.
공이 옳게 여겨 아이를 업고 종(鐘)을 가지고 귀가하여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왕궁(王宮)까지 종(鐘)소리가 들리었다. 왕(王)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서(西)쪽에 이상한 종(鐘)소리가 들리니 찾아 알아보라 하여 좌우(左右) 신하들이 집을 물어 찾아가 말하여 공(公)이 종(鐘)을 가지고 왕궁(王宮)으로 갔다. 왕이 내관(內官)에게 두드려보라 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이 석종(石鍾)을 얻게 되었는가? 하자 공(公)이 사유를 말한즉 왕이 말하기를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은 석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소장하고 집 한채와 세급미(歲給米) 50석을 주게 하고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이 때가 통일신라(統一新羅) 흥덕왕(興德王) 10년 을묘(乙卯) 서기 835년이다. 그리고 후에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하고 묘(墓)는 모량촌(牟梁村) 앞에 있다. 사람들이 이 묘를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
- 손익담 (孫翼淡)
손씨의 시조인 손순의 둘째아들이며 895년(진성여왕 9)에 평해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에서 평해로 이주한 평해손씨 울진입향조이다. 사도(司徒) 손직(孫稷)의 후손이다. 신라 육부(六部) 촌장 중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가 다른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추대하여 사로국을 건국함으로써 개국공신이 되었고, 32년에 그의 손자 직(稷)이 손씨 성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월성군(月城君) 손순(孫順)이고, 아버지는 상서(尙書) 손부(孫富)이다. 아들은 3형제인데 맏이는 손경상(孫景尙), 둘째는 손태상(孫泰尙), 막내는 손취상(孫就尙)이다. 관직이 병부대감(兵部大監)에 이르렀으며, 895년 입향하여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졌다. 울진군 후포면 후포3리 청구동에 있는 숭덕사(崇德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 손인량 (孫仁亮)
고려 원종(元宗) 때의 사람이며 임연(林衍)의 난을 당하여 나라를 도와 훈공을 세운 공신으로 나라에서 기성후(箕城候)에 봉하였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평해손씨는 인량 대에 와서 크게 융성하였다. 평해황씨(平海黃氏) 종무(宗茂)의 따님을 배필로 맞아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득직(得直)인데, 그의 장자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휴(休)이며 정충공파(貞忠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손인량의 차남은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을 지낸 득수(得壽)이며, 그의 장자인 번(蕃)은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동정공파(同正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또 손인량의 3남은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낸 득부(得富)인데, 그의 아들은 가선대부(贈 嘉善大夫)형조참판(刑曹參判)을 추증 받은 영(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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