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이야기

[스크랩] 운암서원 이야기

초심방 2013. 3. 5. 21:58

 

 

 

 

 

 

 

 

 

 

 

 

 

 

 

 

 

 

 

 

명 칭 :  운암서원(雲巖書院)
소 재 지 :  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380

건축 배경
1826년(순조 2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백암(白巖) 김제(金濟), 백계(栢溪) 김희(金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과 9월 24일에 향사를 지내며 서원의 재산으로는 전답 2천 평이 있다.
창건 당시에 운암서원 내에는 충절사(忠節祠), 강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 고직사가 있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4년에 사당인 충절사와 강당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 구성
사당인 충절사에는 물재 손순효와 백계 김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마루와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계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또 사당의 우측에 있는 해단에는 백암 김제를 별도로 모시고 있으며, 향사일에 함께 제향을 올린다.
현재 운암서원 내에는 외삼문·강당·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강당 옆에는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이 있으며, 사당 옆에는 해단(海壇)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5량가 겹처마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중당협실형으로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마루 전면에는 4짝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방은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마루는 쪽마루를 내었다. 강당의 후면에 3계로 된 전통정원을 꾸미고 자연스럽게 경사를 주어 뒷산과 어우러지게 배치했다. 강당의 전면 중앙에 ‘운암서원(雲巖書院)’의 현판을 걸었으며, 그 오른편에 ‘수일당(隨日堂)’의 당호를 걸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맞배지붕을 이었다. 단청을 올렸으며 측면에 풍혈판을 달았다. 기둥은 전열과 후열에만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각각의 칸마다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사당 내부의 종도리 아래에 이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상량이 기록되어 있다.
사당인 충절사 우측에 비각 한 기가 있는데, 해단이다. 해단은 단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전열의 2개의 기둥은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외삼문은 평삼문으로 세웠으며, 내삼문은 1칸 규모의 사주문을 세우고 단청을 입혔다.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건축이야기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 26)에 근서면 반암리(현, 온정면 덕인리) 반암마을에 창건하여 물재 손순효, 백암 김제선생을 봉향했다. ‘반암서원(盤岩書院)’이라 불렀다. 이에 앞서 1년간 근서면 외선미마을에 백암 김제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1835년(헌종 1)에 온정면 금천리 노은동으로 다시 옮겨 세워 33년간 배향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당시 내선미마을에서 노은동으로 서원을 옮겨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원정인(元貞仁), 이원형(李元馨), 조석조(曺錫祚), 박홍주(朴弘周) 등이다.
1902년에 다시 중건하였다가 1964년에 현 위치인 구산리로 옮겨 세웠다. 노은동 유지에는 김용수(金溶秀), 황중곤(黃中坤) 등이 강학당을 복설했으나 현재는 해체되었다. 주민은 온정면 노은마을의 운암서원 유지에 세운 강학당을 ‘서운암서원’으로, 구산리에 옮겨 세운 서원을 ‘동운암서원’이라 부른다. 노은리의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고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의 온돌방이 ‘두수재(道修齋)’이며, 우측방이 ’낙육재(樂育齋)‘이다.
구산리 소재의 운암서원은 1995년 10월에 경북 도비로 서원과 평삼문을 개축하고 담장을 새로 설치하였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백암(白巖) 김제(金濟)
백암 김제는 고려조에 평해 군수를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백암(白巖)이다.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원로(金元老)이다. 선산김씨 울진입향조이다.
평해 군수로 재직할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름을 제해(齊海)로 바꾸었는데, 동해로 뛰어든 제나라 노중련(魯仲連)의 절개를 따른다는 뜻이다. 시 한 수를 써서 벽에 걸어둔 채 행방을 감추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해의 저 배야 노중련의 나루터가 어디냐 / 오백 년 고려조의 한 사람 신하로다
외로운 나의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 붉은 해 따라 단심을 비추고 싶구려.”
1803년(순조 3)에 후손 김양선(金養善)이 김제와 그의 동생 김주(金澍)의 시와 편지글, 왕이 내린 교서 등을 모아 『쌍절록(雙節錄)』 2권 1책을 펴내었다.
정조(正祖)는 김제와 김주를 고죽국의 백이·숙제의 충절에 비유하면서 바다에 단을 세워 초혼제를 치르게 하였으며, 안동의 고죽서원(孤竹書院)에 배향하였다. 이어 정조는 영남지역 유생들의 건의에 따라 시호를 내리는 교서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운암서원(雲巖書院)에서 손순효(孫舜孝)와 함께 제향하고 있다. 시호는 충개(忠介)이다.
-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조선 전기의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신이다. 대사헌과 한성부판윤,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이다.
평해군(平海君) 손익담(孫翼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군수 손밀(孫密)이고, 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부인은 평산신씨로 감찰 신자의(申子儀)의 딸이다. 1427년(세종 9)에 태어나 1497년(연산군 3)에 사망했다.
1451년(문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년(단종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문과중시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경창부승에 발탁되고, 병조좌랑을 거쳐 1471년(성종 2)에 전한집의가 되어 17개 항목의 정책을 상소하여 채택되면서 형조참의로 특진했다. 그러나 직무의 처리가 잘못되었다 하여 상호군(上護軍)으로 좌천되자 사퇴하여 남산 밑에 초정(草亭)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으며, 1475년(성종 6)에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성종 9)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尹氏)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경기도 관찰사·대사헌·한성부판윤·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 왕의 미움을 사서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496년(연산군 2) 늙었으므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궤장(机杖)이 내려졌다. 1497년 향년 71세에 사망하였다.
성리학의 대가로 특히 『대학』, 『중용』, 『역경』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으며『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26년에 간행한 문집『물재집(勿齋集)』 2권 1책이 있다.
울진군 온정면 노은동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787년에 훼철되었다가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에 재건되었다.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백계(栢溪) 김희(金喜)
생몰년이 불확실하다. 천성이 활발하고 아담하며, 지조는 간략하고 담담하였고, 문장이 박흡(博洽)하여 사림들이 그를 높이 여겼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군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상주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울진의 운암서원과 비안(比安)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마을이야기

울진 > 원남기성권 > 기성면 구산리
- 구산리
울진군 기성면에 속하는 법정리이다. 본래 평해군(平海郡) 근남면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에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로 개편되었다.
굴미봉(掘尾峰) 아래 동쪽으로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구산포(邱山浦)라고 알려졌으며, 고려(高麗) 말(未)에 평해군수(平海郡守) 백암(白岩) 김제(金濟)가 지형(地形)이 거북의 꼬리와 같다 하여 구미(龜尾)로 개칭(改稱)하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邱山里)로 되었다. 1980년대에 구산1리와 2리로 나뉘었다. 자연마을로는 운암, 백암, 도해암 등이 있다.
구미산을 등진 구산마을은 동쪽으로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바라보며 바다와 접(接)하고, 서쪽은 황보2리(黃堡二里), 남쪽에는 평해읍 월송2리 군무봉(軍舞峯)과 접하며, 북쪽은 봉산2리(峰山二里)와 인접(隣接)하고 있다.
마을 주민은 1970년대 이전까지 주로 농업에 종사했으나, 정치망어장 어업이 발달하면서 주민의 80% 이상이 어업으로 전환하였다. 마을주민의 소유 농경지는 ‘황지골’, ‘뒷골’, ‘장수골’ 등에 있으며, 7번 국도 너머에 있는 ‘황보들’, ‘오곡들’에서도 농사를 짓는다.
마을의 역사는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주민은 “김해김씨가 터전을 잡고 순흥안씨가 ‘골매기당’을 이룩했다.”라고 전한다.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당’의 신은 ‘안씨할배’이다. 마을주민은 이 ‘안씨할배’ 3형제가 500여 년 전에 순흥에서 기성으로 들어와 척산리와 정명리, 구산리에 각각 정착했다고 믿는다.
마을의 주요생산은 자연산 미역이다. 미역생산은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어촌계가 담당하며, 매년 노반회에서 ‘미역짬’을 분배한다. 마을의 주요 미역짬은 ‘송어암’, ‘금정암’, ‘치암’, 개삼암‘, 큰대암’, ‘북바우’, ‘고래암’ 등이다.
2008년 총 530세대에 627명(남자 296, 여자 331)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주요 수산물은 오징어·고등어·전어 등의 어획과 미역의 채취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성씨별 가구 수는 김해김씨(金海金氏) 80, 순흥안씨(順興安氏) 50, 경주이씨(慶州李氏) 34, 안동권씨(安東權氏) 21, 밀양박씨(密陽朴氏) 17, 김녕김씨(金寧金氏) 15, 평해손씨(平海孫氏) 13, 파평윤씨(坡平尹氏) 10, 강릉최씨(江陵崔氏) 8, 울진임씨(蔚珍林氏) 8, 봉화정씨(奉化鄭氏) 8, 청주한씨(淸州韓氏) 7, 평택임씨(平澤林氏) 7, 온양방씨(溫陽方氏) 6, 기타 40가구다. 마을의 문화적 경관으로는 운암서원(雲巖書院), 대풍헌(待風軒), 백암 김제(金濟)의 시가 새겨진 바위인 도해암(蹈海岩)과 평해 북천교비, 구산해수욕장 등이 있다.
구산리 북천교비는 1603년(선조 36) 3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재질은 사암이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었으며, 크기는 높이 187cm, 너비 64cm, 두께 18cm이다. 이곳은 동해와 황보천이 만나는 곳으로 바닷물이 늘 범람해 백성이 통행에 어려움이 많아 당시 군수 조인징(趙仁徵)의 허락을 얻어 주민이 힘을 모아 돌다리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주민은 ‘말무덤비’라 부른다.
글씨는 정연한 행서체이나 간혹 초서를 사용하였으며, 비의 건립 경위와 만력(萬曆) 31년(1603) 3월이라는 건립 시기, 대시주(大施主)와 공양주(供養主) 등 다리를 만드는데 참여한 총 1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권끝쇠, 광큰버들쇠 등의 글자로만 보아도 당시 천민 계층이었을 사람들의 이름이 한자 그대로 적혀 있다. 이 비의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황보천(黃堡川)은 당시의 북천(北川)이며, 지금의 군무교(軍舞橋)가 있는 곳이 당시의 북천교(北川橋)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에 보이는 평해 군수 조인징은 1599년(선조 32) 2월 16일에 부임하여 1603년 3월 13일 철원 부사로 이임해 갔으므로 이 비는 그가 평해를 떠나기 직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비를 통해서 17세기 초 평해 지역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이 당시의 발음에 맞추어 한자로 기록된 점은 국어학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4년에 유형문화재 제361호로 지정하고 2006년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마을의 남쪽 초입에 국도 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고, 이외에도 소규모의 도로가 해안을 비롯하여 군데군데 연결되어 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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