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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방 2006. 5. 16. 13:35
[스포츠 인물 秘史] 孫基禎과 南昇龍、빛과 그림자 | 역사.인물 2005/06/0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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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인물 秘史] 孫基禎과 南昇龍、빛과 그림자 

 

「풍국제분」을 불하받은 孫基禎, 은둔의 길을 택한 南昇龍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孫基禎과 南昇龍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식민지 백성의 아픔을 덜어주는 낭보였다.

그러나 養正高普 선후배 사이로 善意의 경쟁자였던 두 사람의 운명은 이후 확연히 갈라졌다.

孫基禎은 말년까지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南昇龍은 孫基禎의 그늘에 가려졌고, 1960년대 후반 은둔의 길을 선택했다.


高 斗 炫

1935년 일본 오사카 출생. 한국해양大 항해과 졸업.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同 주간스포츠부장·체육부장, 한국체육대학 사회체육대학원 강사 역임. 한국신문협회상, 아산체육기자상 수상. 저서 「스포츠의 영웅들」, 「한국을 이끄는 사람들-손기정」 등 다수. 

 高斗炫 스포츠 칼럼니스트·前 서울신문 체육부 국장급 기자

 

  孫基禎 『호떡이라도 실컷 먹어 보았다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시상식 단상에 선 孫基禎(왼쪽)과 南昇龍.>

 11월15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孫基禎(손기정)의 2週忌가 되는 날이다.   
  『우리 민족이 日帝의 탄압 아래 산송장이나 다름없을 때 孫基禎과 南昇龍 두 선수가 조선의 명예를 위해 세계무대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 3000만 민족도 이 두 선수처럼 꺾이지 않는 투지를 발휘하자』   
  李承晩 대통령의 말대로 두 사람은 日帝에 나라를 빼앗겨 암울했던 시절 조선 민족의 자부심이었다.
 
  필자는 1990년대 초, 孫基禎과 복싱원로 金明坤(김명곤)과 함께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점심식사를 하곤 했다. 우리는 보신탕집을 즐겨 찾았는데, 孫基禎은 고기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너무나 가난해서 고기는 먹어볼 엄두도 못 냈어. 養正에 다니면서 힘들게 훈련할 때 고기는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호떡이라도 실컷 먹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지』   
  당시 호떡 한 개에 5전이었다고 한다. 집이 가난한 孫基禎은 호떡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없는 처지였다. 孫基禎의 얘기다.     『우리 養正高普 근처에 호떡집이 네댓 군데 있었지. 하지만 齊洞에 가면 같은 5전을 주어도 큰 호떡을 파는 집이 있었어. 그래서 그 큰 호떡을 사 먹기 위해 齋洞까지 열심히 걸어가곤 했어. 왔다 갔다 하면서 힘빠지는 걸 생각하면, 호떡을 사 먹으러 재동까지 갔던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그때 호떡을 마음껏 먹고 달렸으면 내 마라톤 기록이 더 좋았을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할 때, 孫基禎의 표정은 진지했다. 
  孫基禎의 말이 맞을는지 모른다. 마라톤 선수들은 30~35km 지점까지 근육 속의 글리코겐을 연료삼아 달린다. 밀가루와 설탕으로 이루어진 호떡은 글리코겐을 공급하기에 매우 좋은 음식이다. 가난했던 孫基禎은 배가 고프면 호떡 대신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달려야 했다.   
  
  호떡 좋아한 孫基禎, 찹쌀떡 좋아한 南昇龍  
  필자가 孫基禎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여름 서울신문 견습기자로 체육부에 배치되어 대한체육회와 KOC(대한올림픽위원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 KOC 위원장이었던 李相佰(이상백) 박사의 사무실은 마치 체육계 重鎭들의 살롱 같은 분위기였다   
  축구의 金容植(김용식)·李裕瀅(이유형), 농구의 李性求(이성구)·丁相允(정상윤), 유도의 李齊晃(이제황), 복싱의 金明坤(김명곤), 아이스하키의 劉漢澈(유한철), 그리고 마라톤의 孫基禎 등 「살아 있는 體育史」 같은 인물들이 모여들어 李相佰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孫基禎을 만났을 때, 필자는 그가 강한 눈빛을 지니고 있어 의지가 매우 굳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당시 한국선수단 단장이던 孫基禎을 취재했다. 1980년대에는 孫基禎이 필자와 같은 동네인 서울 동부이촌동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만나 스포츠 이외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나 南昇龍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딱 한 차례뿐이다. 1960년 가을, 필자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인 李裕瀅 체육부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 마포에 살고 있던 南昇龍을 찾아가 그의 근황을 취재했다.   
  단정한 한복차림에 안경을 쓴 南昇龍은 스포츠맨이라기보다는 선비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찹쌀떡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경기 직전에 흔히 「모찌(餠)」라고 부르는 일본 찹쌀떡을 먹지 않으면 기운이 나지 않아 잘 달릴 수 없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南昇龍의 先見之明  
  南昇龍은 마라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출발 전에 찹쌀떡 네댓 개와 경우에 따라서는 찐 고구마를 먹고 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일부 육상 관계자들은 「경기 직전에 소화가 잘 안 되는 찹쌀떡을 먹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南昇龍을 비웃었다고 한다. 
   찹쌀떡은 호떡처럼 글리코겐을 공급해준다. 뒷날 일본 실업 육상팀이 마라톤 선수들에게 경기를 앞두고 찹쌀떡을 권하게 된 것을 보면 南昇龍은 先見之明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탄수화물은 먹고 난 뒤 세 시간이 지나야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시간 남짓에 끝나는 마라톤에서는 경기 직전에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것이 별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南昇龍의 경우는 몸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탄수화물을 글리코겐으로 바꾸는 특이체질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南昇龍이 특히 막판에 강했던 것은 찹쌀떡이 글리코겐으로 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필자는 「南昇龍이 경기 직전이 아니라, 탄수화물이 글리코겐으로 바뀌는 데 충분한 시간인 경기 세 시간 전쯤에 찹쌀떡을 먹었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뒷날 全南大 체육교수를 지낸 南昇龍이지만, 경기를 앞두고 靈柩車(영구차)를 보아야만 운이 좋아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南昇龍이 일본 明治大에 재학할 당시, 그의 후원자였던 기타바타케가 경기 당일 아침 일찍부터 南昇龍을 차에 태우고 東京시내를 돌며 영구차를 찾아 헤맨 이야기는 유명하다.   
  
  孫基禎, 養正高普 1년 선배인 동갑내기 南昇龍을 평생 선배로 모셔 
  孫基禎은 1912년 평북 신의주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경영하던 孫仁碩(손인석) 슬하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워낙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孫基禎은 어렸을 때부터 여름에는 참외와 옥수수, 겨울에는 군밤 등을 팔며 초등학교 수업료를 벌어야 했다. 남달리 빠른 발을 이용해 전보배달도 했다.   
  南昇龍은 1912년 전남 順天에서 가난한 농부 南贊叔(남찬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상으로는 孫基禎의 생일이 빠르다. 당시는 호적의 나이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1931년 서울로 올라온 南昇龍은 협성실업학교에 들어갔다가, 열아홉 살 때 養正高普(양정고보: 지금의 중학교) 1학년에 편입했다. 孫基禎은 그 이듬해 스무 살의 나이로 養正高普에 입학했다. 공식적으로는 동갑내기인데도 孫基禎은 養正 1년 선배인 南昇龍을 평생 동안 깍듯이 선배로 예우했다.   
  당시 서울에서의 하숙비는 한 달에 13원이었다. 10원이면 쌀 세 가마를 사고도 돈이 좀 남는 시절이었으니,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매달 13원씩을 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孫基禎과 南昇龍은 養正 육상부 특기생이었지만,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특혜란 수업료 면제뿐이었다. 하숙비·교과서·문방구 값은 모두 본인 부담이었다.   
  孫基禎은 선배들이 썼던 교과서를 물려받아 사용하고, 육상부 선배인 부잣집 아들 金鳳秀의 집에 가정교사 명목으로 들어가 숙식을 해결했다. 孫基禎은 『南兄(南昇龍)이나 내가 養正에 다니던 시절 하숙비 13원을 장만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면서 『전차값 3전을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녔다』고 했다.   
  南昇龍은 고향으로부터의 송금이 점점 줄어들자 『일본에 가면 苦學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한 南昇龍은 1934년 明治大 전문부로 진학했다. 南昇龍은 도쿄-하코네 사이에서 벌어진 대학역전경주대회에 출전, 놀라운 스피드로 달려 明治大 우승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이 모습을 눈여겨 지켜본 明治大 출신 기타바타케라는 부자가 南昇龍이 졸업할 때까지 학비 일체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南昇龍은 학업과 운동에 열중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그는 출전하는 경기마다 상위 10위권에 들었다.   
  
  러닝셔츠 무게 줄이려 가위로 잘라내기도  
  養正 재학 시절, 孫基禎은 이른 새벽 삼청동을 돌아 북악산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가는 것이 日課였다. 내려올 때에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누비며 일정한 리듬으로 달렸다.   
  孫基禎은 가파른 산비탈을 쉬지 않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심폐기능과 근지구력을 강화했고, 달려 내려오면서 달리기의 리듬감각을 익혔다. 그의 회고다.   
  『장거리 경주에서는 팔과 다리 놀림에 호흡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매우 중요하지. 이런 감각은 산을 내려오면서 연마할 수 있었어. 평지에서는 도저히 경험하기 어렵지. 조금이라도 빨리 달리고 싶어 안 해 본 일이 없어.   
  우리나라 독립군이 바지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면서 다리 힘을 기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렇게 해보았지. 그런 훈련이 오늘날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아.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을 하다가 그걸 풀어 놓으면 마치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볍게 달릴 수 있었어』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일본의 마라톤 대표선수 나카야마(中山竹通)는 115g밖에 안 되는 가벼운 마라톤 슈즈를 신고 뛰었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가벼운 신발은 옛날부터 마라톤 선수의 꿈이었다. 孫基禎은 『신발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 보려고 칼로 신발바닥을 조심조심 깎아내곤 했다』고 회상했다.   
  孫基禎은 가위로 러닝셔츠를 도려내고 팬티를 잘라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피로와 走幅(주폭)의 상관관계를 실험해 보았다고 한다. 
   『신발바닥에 횟가루를 칠하고 트랙을 도는 거야. 트랙을 몇 바퀴나 돌면 피로 때문에 달리는 스트라이드(stride)가 좁아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야.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별것 다해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전문적인 코치도 없이 孫基禎은 타고난 자질과 성실한 노력에 독창적인 발상을 더해 가면서 세계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기미가요」가 어째서 朝鮮의 國歌냐? 
  孫基禎은 1935년 11월3일 베를린 올림픽 파견 2차 선발전 겸 제8회 明治神宮 경기대회 마라톤에서 2시간26분42초로 당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당시 일본육상경기연맹은 공인 세계기록이나 세계 타이 기록이 세워지면 시상식에서 일본 國歌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孫基禎의 明治神宮 경기대회 우승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의 호치(報知)신문(1935년 11월4일자)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시상대 위의 孫군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스탠드의 관중들이 부르는 國歌에 묻혀 조용히 눈물짓고 있었다』   
  그러나 孫基禎의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분함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시상식이 끝나자 孫基禎은 곧바로 養正응원단석 바로 아래 필드에 있던 인솔교사 金淵昌(김연창)에게 달려갔다. 눈물에 젖은 孫基禎은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외치며 金淵昌 교사의 품에 안기더니 이렇게 절규했다.   
  『선생님, 왜 우리나라에는 國歌가 없습니까? 어째서 「기미가요」가 朝鮮의 國歌입니까?』   
  孫基禎의 말에 金淵昌은 당황했다. 마라톤 세계 최고기록을 수립한 孫基禎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일본기자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만일 일본인 가운데 누군가가 孫基禎이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 不逞鮮人(불령선인: 불온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으로 몰릴 판이었다.   
  자신도 눈물을 흘리면서 金淵昌은 목소리를 낮추어 孫基禎을 타일렀다.   
  『基禎아, 지금 여기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일본인 기자 한 명이 일본말로 金淵昌에게 물었다.   
  『왜 孫基禎 선수는 저렇게 울고 있습니까?』   
  金淵昌은 이렇게 둘러댔다.   
  『孫군은 이번 세계 최고기록 수립으로 베를린 올림픽 출전자격을 얻은 것으로 생각해 아까부터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孫군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孫基禎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냉정을 되찾았다. 孫基禎의 인터뷰와 사진촬영이 끝나자마자 金淵昌은 孫基禎을 택시에 밀어 넣고 도망치듯 숙소로 향했다. 직선적인 성격의 孫基禎이 또 무슨 말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孫基禎의 강한 민족정신은 養正의 훌륭한 교사들에 의해 배양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제8회 明治神宮대회에서 농구팀을 인솔했던 교사 金敎臣(김교신)은 후일 「聖書조선」 사건으로 獄苦를 치렀던 민족주의 성향의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였다.
 
  養正高普 출신인 柳達永(유달영) 서울大 명예교수는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孫基禎 선수도 金敎臣의 민족애와 인격적 감화에 힘입어 육체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日, 『朝鮮人 마라톤 선수는 한 명만 뽑아라』  
  1936년 5월21일 베를린 올림픽 출전 일본 마라톤 대표 최종 선발전이 明治神宮 경기장과 로쿠고바시(六鄕橋) 사이의 공식코스에서 치러졌다.   
  출전선수는 일본육상경기연맹이 후보 선수로 선정한 孫基禎, 南昇龍, 스즈키(鈴木), 이케나카(池中), 시오아쿠(鹽飽) 등 8명과 전국 14개 지역에서 뽑힌 신진 13명, 모두 21명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 3명을 베를린 올림픽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孫基禎의 자서전과 일본의 가마다(鎌田忠良)가 쓴 「日章旗와 마라톤-베를린 올림픽의 孫基禎」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최종 선발전에서 孫基禎은 의도적으로 南昇龍에게 1위를 양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육상경기연맹을 대표해서 일본육상경기연맹과 접촉하고 있었던 사람은 養正을 거쳐 明治大를 나온 鄭商熙(정상희)였다.   
  최종 선발전을 앞두고 鄭商熙는 孫基禎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왜놈들은 지난 올림픽 마라톤에서 참패한 것은 조선선수가 두 사람이나 끼어 있어 팀워크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라고 단정짓고 있어. 그래서 이번 최종 선발전에서는 일본의 시오아쿠와 스즈키를 우선적으로 뽑은 다음 孫基禎과 南昇龍 둘 가운데 하나만 보낼 작정이야』   
  鄭商熙가 말하는 지난 대회의 참패란 1932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대표로 출전했던 츠다(津田)가 5위, 金恩培(김은배)가 6위, 權泰夏(권태하)가 9위를 각각 차지한 것을 말한다.   
  그때 경기를 앞두고 츠다는 金恩培와 權泰夏에게 『너희 두 사람은 경기할 때 나를 앞지르지 마라. 나를 선두로 해서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르라. 이것이 일본이 필승을 거두는 팀워크이자 절대조건이다』라고 요구했다.   
  
  孫基禎, 南昇龍이 1위를 하게 경기운영 
  경기가 끝난 후 츠다는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조선 선수들이 나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구 앞으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페이스를 잃어 우승을 놓쳤다』고 주장했다.   
  츠다의 주장에 분개한 權泰夏는 『츠다가 있는 일본팀과는 행동을 함께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미국에 남아 南캘리포니아大에 입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상경기연맹은 1932년 LA 올림픽에서와 같은 일이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에는 조선 선수를 한 명만 출전시키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鄭商熙는 이렇게 말했다.   
  『基禎아, 너는 지난해 11월의 올림픽 파견 2차 선발전에서 세계 최고기록까지 냈으니 이번 최종 선발전에서는 2위만 차지해도 뽑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南昇龍은 그 대회에서 4위밖에 못 했으니 이번 최종 선발전에서 1위가 안 되면 베를린에는 못가』   
  鄭商熙의 이야기를 들은 孫基禎은 「최종 선발전에서 南兄(南昇龍)이 1위, 내가 2위로 골인하도록 경기운영을 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최종 선발전 당일, 기온은 25℃를 웃돌았다. 마라톤 경기를 치르기에는 더운 날씨였다. 선수들은 더위 때문에 페이스를 무너뜨리게 될까 봐 두려운데다가, 「기록이야 어떻든 꼭 3위 안에 들어야만 베를린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과감하게 앞서 나가기를 꺼렸다.   
  선두 그룹에 끼어 있던 孫基禎이 반환점을 돌아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다른 선수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일본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따라왔다.   
  孫基禎은 일본 선수들이 따라오면 페이스를 늦추어 함께 달리다가 다시 스퍼트를 걸어 앞서 나가 일본 선수들을 따라오게 만들면서 스즈키, 시오아쿠 등의 진을 빼버렸다   
  그 사이 더위와 후반에 강한 南昇龍은 앞서가던 일본 선수들을 차례로 잡아 도라노몽(虎之門)에서 맨 앞을 달려가던 孫基禎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南昇龍이 孫基禎에게 격려의 말을 던졌다.   
  『孫, 정신 차려. 다른 놈들은 다 녹초가 됐으니 잘 뛰어!』  
  南昇龍은 피로의 기색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 1위로 골인했다. 뒤이어 孫基禎이 계획했던 대로 2위로 들어갔다. 3위는 스즈키, 4위는 시오아쿠였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큰 충격을 받았다. 최종 선발전의 上位 3명을 베를린에 보낸다고 공표해 놓고, 내부적으로는 조선인 선수는 한 명만 보내기로 해놓고 있었는데, 南昇龍과 孫基禎이 1·2위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고 이틀 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베를린 올림픽 파견선수를 결정하기 위한 기술위원회를 열었다.   
  몇몇 일본 육상 관계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南昇龍은 비록 최종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는 하나 그동안의 기록이 별로 좋지 않았고, 이번에 1위를 차지한 것도 다른 선수들의 컨디션 亂調 덕분이니, 대표선수에서 탈락시켜야 한다』   
  조선육상경기연맹을 대표해 그 자리에 참석했던 鄭商熙가 반박했다.   
  『최종 선발전의 上位 입상자 세 명을 올림픽 대표로 뽑겠다는 것은 일본육상경기연맹의 공약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1위 南昇龍을 뽑지 않겠다니 말이 됩니까? 南昇龍을 안 보내고 누구를 베를린 올림픽에 보내겠다는 겁니까?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선수에게 어찌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겠소?』   
  
  南昇龍, 코치를 몰아내다  
  鄭商熙의 말에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鄭씨의 말이 옳아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의 세단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 육상계의 큰별 오다(織田幹夫)였다. 오다의 한 마디에 대세는 결정됐다. 南昇龍은 올림픽 대표로 뽑혔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달려 있었다. 孫基禎, 南昇龍, 스즈키, 시오아쿠의 네 명을 베를린에 보내 현지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갖고 세 명을 가려낸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마라톤 대표팀의 코치는 1932년 LA 올림픽에서 5위를 차지했던 츠다였다. 그때 함께 출전했던 金恩培와 權泰夏에게 경기에서 자기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 주문했던 츠다가 이번에도 조선인 선수들에게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뚝심이 강한 南昇龍은 다른 세 명의 선수를 끌어들여 일본육상경기연맹에 츠다 코치의 경질을 요구했다. 『지난 2년 동안 후보 선수들은 츠다의 지도를 받았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들은 일본 육상계 원로들과 격론을 벌인 끝에 베를린으로 떠나기 1주일 전에 츠다를 내몰아 버렸다. 사토(佐藤)가 코치로 들어왔다. 코치 교체의 표면상 이유는 츠다의 身病 때문이라고 발표됐다.
 
  베를린 현지에서의 평가전에서 스즈키가 탈락했다. 孫基禎과 南昇龍, 시오아쿠 세 명이 마라톤 本경기에 출전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이 확정된 南昇龍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출발신호를 들을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孫基禎과 南昇龍의 제자로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咸基鎔(함기용)은 『마라톤 경기에서 작전을 세워 자신은 2위로 들어오고, 다른 선수를 1위로 골인 시킨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훗날 孫基禎도 자신이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 파견 마라톤 일본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南昇龍에게 1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이를 부인했다. 이에 대해 孫基禎이 南昇龍의 체면을 생각해 자서전 내용을 부인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선두를 따라잡은 뒤 결승점까지 獨走  
  1936년 8월9일 오후 3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27개국 56명의 선수 가운데 孫基禎과 南昇龍도 끼어 있었다.   
  6km 지점에서 지난 대회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사발라를 선두로 포르투갈의 디아스, 영국의 하퍼에 이어 孫基禎은 4위로 나섰다.   
  후반에 강한 南昇龍은 더운 날씨와 어려운 코스를 머리에 넣고 초반에 무리하지 않고 후반에 역전할 속셈으로 뒤에 처져 달렸다.   
  孫基禎과 나란히 달리게 된 하퍼는 孫基禎에게 『슬로(Slow), 슬로! 세이브(Save), 세이브』라고 말을 건넸다. 더운 날씨에 전반부터 스피드를 너무 내면 후반에 체력이 저하되니, 체력을 축적하라는 충고였다.   
  孫基禎은 21km의 반환점이 보일 때 디아스를 따돌리고, 27km 지점에서는 하퍼를 제쳤다.   
  『이쯤에서 하퍼를 뿌리치지 않으면 끝까지 달라붙어 접전을 벌이게 될지 모르니 떼어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29km 지점에서 선두 사발라를 따라잡은 孫基禎은 그 뒤 결승점까지 獨走했다.   
  
  南昇龍, 지나치게 체력 안배에 신경쓰다 銀메달 놓쳐
   선두에 나선 순간부터 孫基禎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孫基禎은 70세를 앞두고 있을 무렵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라톤에서 선두를 달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안한 일이야. 뒤에서 누가 쫓아오지 않을까라고 걱정이 되지. 지금도 그런 꿈을 꾸어. 제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달리려 해도 몸이 말을 안 들어. 그런데 뒤에서는 자꾸 선수들이 몰려오고…. 여간 기분 나쁜 게 아냐』   
  한편 반환점을 33위로 돈 南昇龍은 그 뒤 무서운 속도로 앞서가는 선수들을 차례로 제쳐 나가기 시작했다. 30km 지점에서 16위로 나선 南昇龍은 31km 지점에서는 10위, 빌헬름 언덕 바로 앞의 32km 지점에서는 7위로 올라왔다. 빌헬름 언덕을 넘어선 南昇龍은 놀라운 저력을 발휘해 3위로 올랐다.   
  그의 앞에는 이제 孫基禎과 하퍼 두 사람만이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고비인 비스마르크 언덕이 시작되는 37km 지점에 이르렀을 때, 孫基禎과 하퍼의 거리는 1분 가량, 그리고 하퍼와 南昇龍의 거리는 2분15초 가량이었다.
 
  主경기장 마라톤 게이트 근처에 몰려 있는 인파 한가운데 뚫린 검은 공간인 마라톤 터널을 뚫고 들어간 孫基禎은 10만 관중들의 환호 속에 트랙을 돌고 결승점을 통과했다. 孫基禎의 우승기록 2시간29분19초2로 올림픽史上 최초로 2시간30분의 벽을 깬 당시 올림픽 최고기록이었다.   
  필드의 잔디에 앉아 신발을 벗은 孫基禎의 발은 물집이 생긴데다 군데군데 갈라져 피투성이어서 그가 얼마나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때쯤 관중들에게 보이지 않는 마라톤 터널에서는 2위 하퍼와 3위 南昇龍이 처절한 레이스를 벌이고 있었다. 페이스의 안배에 무척 신경을 쓰고 달렸지만 하퍼는 피로의 기색이 뚜렷했고 후반에 강한 南昇龍은 힘찬 라스트 스퍼트로 하퍼를 맹추격하고 있었다.   
  孫基禎이 결승점에 들어온 지 2분쯤 지나서 하퍼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는 바로 쓰러져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의 기록은 2시간31분23초였다.   
  하퍼보다 19초 뒤져서 南昇龍이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골에 들어왔다. 그의 기록은 2시간31분42초였다. 골을 5km 남짓 남긴 지점에서 하퍼에게 2분15초나 뒤져 있었던 南昇龍이 골에 들어올 때쯤에는 그 거리를 거의 2분이나 단축한 것이다.   
  결승점을 통과한 南昇龍은 자신의 레이스 운영이 납득이 안 간다는 듯 손목시계에 눈길을 보냈다.   
  베를린 올림픽의 더운 날씨, 오르막길의 어려운 코스는 南昇龍에게 더할 수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가 19초차로 3위를 한 것은 그가 조금만 더 빨리 스퍼트를 걸었더라면 금메달은 어려워도 은메달은 딸 수 있었음을 뜻한다.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을 본 咸基鎔은 『골에 들어온 南선생님은 체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체력 안배에 지나치게 신중해서 아깝게 은메달을 놓친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실이 南昇龍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을 것이다.   
  
  마라톤 경기 당일에만 일장기 단 孫其禎 
  『孫基禎은 마라톤 경기 당일 하루만 일장기를 달았다』는 소문이 있다. 일본의 가마다(鎌田忠良)는 이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孫基禎·南昇龍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시오아쿠가 보관하고 있던 30장의 사진을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들을 뒤져 보았다.   
  그 결과 孫基禎은 베를린 올림픽 기간 중,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언제나 양복차림이거나 일장기 없는 유니폼 차림이었음이 확인됐다.   
  일본 마라톤팀이 베를린 현지에 도착한 것은 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이었다. 孫基禎은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날까지 코치가 아무리 권해도 일장기 달린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孫基禎은 『귀한 유니폼이니 대회가 열릴 때까지 더럽히지 않고 간직하겠다』고 둘러댔다.   
  훈련이 없는 일요일에 선수단은 베를린 현지의 일본인들로부터 자주 초청을 받았다. 그때도 孫基禎 혼자만은 일장기가 달리지 않은 양복차림으로 참석했다. 孫基禎은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일장기 달린 옷은 입지 않았다. 일장기를 달 수밖에 없었던 경기 때 한 차례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東亞日報가 孫基禎의 우승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장기 말소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孫基禎이 이 사건에 대해 듣게 된 것은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 중국 上海에 들렀을 때였다.   
  이 소식을 듣고 孫基禎은 런던에서 만났던 申性模(신성모·후일 국방부 장관)의 얘기가 생각나서 깜짝 놀랐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孫基禎은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혼자 런던으로 여행을 갔다. 大英帝國이 어떤 나라인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선의 1등 항해사로 일하고 있던 申性模는 孫基禎에게 『당신이 돌아가기 전에 고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무쪼록 언동에 조심하시오』라고 당부했다.   
  60년 후 孫基禎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 참 신통한 일이야. 申性模씨가 딱 「일장기 말소사건」이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단 말이야. 그분은 어떻게 그런 일을 미리 알았을까?』   
  아마도 申性模는 孫基禎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 日帝의 억압 아래 시달리고 있던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매우 강하게 자극하게 되리라고 내다보았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사라져 버린 南昇龍  
  광복 후 孫基禎과 南昇龍은 선배 金恩培 등과 함께 조선마라톤보급회를 결성해 후진들을 길러냈다.
 
  徐潤福(서윤복)이 우승한 1947년의 보스턴 마라톤에 孫基禎은 감독으로, 南昇龍은 선수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35세의 南昇龍은 12위를 차지했다. 그 뒤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등을 지낸 南昇龍은 전남大 체육교수로 4~5년 동안 재직하다가, 1960년대 후반 홀연히 사람들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孫基禎은 금메달 리스트인 자신의 그늘에 가려 南昇龍이 별로 빛을 못 보고 있다고 항상 미안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육상인들이나 사회에서 南兄을 잘 禮遇해 드려야 하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南昇龍이 사람들 앞에서 사라진 지 10여 년이 지난 1980년 9월 養正의 체육교사를 지낸 李丙權(이병권)이 養正體育史에 南昇龍의 발자취를 담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南昇龍은 그의 나이 네 살 때 돌아가신 친어머니 사진을 꺼내 보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현지 평가전에서 탈락했던 일본의 스즈키 선수에게 미안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南昇龍은 1996년 서울에서 孫基禎, 徐潤福 등과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咸基鎔 등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60주년을 기리기 위해 주선한 자리였다. 그 뒤 南昇龍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咸基鎔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南昇龍 선생님이 외부와 연락을 끊게 된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워낙 독서를 좋아해 서재에서 지내시는 시간이 많았던 데다, 눈이 나빠지면서 바깥출입에 번거로움을 느끼게 되셨을 것이다.   
  孫基禎 선생님과는 사이가 좋았으나, 뒷날에는 사이가 벌어졌던 것 같다. 孫基禎 선생님은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풍국제분이라는 제분공장을 불하받았다. 첫 번째 부인과 死別한 孫선생님은 그 공장의 경영을 두 번째 부인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경영이 어려워지자 孫선생님 부인은 南선생님 부인에게서 돈을 빌려다 썼다.   
  결국 풍국제분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돈을 돌려받지 못한 南선생님은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 일로 두 분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으로 안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나 여러 기관들로부터 초청을 받는 孫선생님과 달리 南선생님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孫선생님에게 「초청받을 때마다 南선생님도 함께 가실 수 있도록 초청자에게 교섭하시라」고 말씀드렸으나,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츠부라야의 비극과 南昇龍  
  南昇龍이 체육계와 연락을 끊은 시점이 1960년대 후반이라는 점에서 필자 마음에 짚이는 일이 하나 있다.   
  혹시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어났던 2·3위 역전극, 3위로 밀려난 일본의 츠부라야(圓谷幸吉)가 4년 뒤 자살한 사건이 南昇龍에게 큰 충격을 주어 더욱 사람 만나기를 꺼리게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도쿄 올림픽의 마라톤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아베베가 2시간12분11초2의 세계 최고기록으로 올림픽史上 최초의 마라톤 2連覇를 이룩했다   
  2위는 영국의 히틀리로 2시간16분19초2였고, 3위가 일본의 츠부라야로 2시간16분22초8이었다. 아베베보다 4분 가량 늦어 경기장에 두 번째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츠부라야였다.   
  그 뒤로 5m 가량 떨어져 몸집 큰 히틀리가 따라 들어왔다. 스탠드를 메운 일본 관중들이 츠부라야를 응원하느라 지르는 함성 속에 츠부라야가 자신을 뒤따르는 히틀리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 제3코너에 이르렀을 때, 히틀리가 츠부라야를 추월했다.   
  순간 츠부라야는 놀라는 기색을 보여 황급히 뒤쫓으려 했으나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결국 2위 히틀리보다 3초 가량 뒤져 결승점을 통과한 츠부라야는 일본 마라톤史上 최초의 올림픽 메달 리스트가 됐다   
  그의 동료 기미하라(君原)는 『3초 차이로, 그것도 경기장 안에서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추월을 당해 은메달을 빼앗긴 츠부라야의 표정은 처절할 정도로 어두웠다』고 회고했다.   
  츠부라야는 1968년 1월, 부상으로 멕시코 올림픽 출전이 가망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라톤에 삶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나이의 최후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위 하퍼를 맹추격해 19초차까지 육박했으면서도 끝내 역전을 이루지 못한 南昇龍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츠부라야를 제치고 은메달을 낚아챈 히틀리의 역전극을 보고 어떤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까? 
  孫基禎의 마지막 住居는 경기도 수지의 한 연립주택이었다. 그의 말년에 필자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孫基禎의 딸 文英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요즘은 산책 나갔다가 넘어져서 울고 들어오세요』   
  세계를 제패했던 다리가 세월을 못 이겨 이제 제 몸 하나 지탱 못 하게 된 것이다. 수지로 옮기기 전 경기도 과천의 아파트에 살던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孫基禎은 전철역 근처의 돼지갈비집까지는 천천히 걸어나올 수 있었다. 그때 孫基禎은 『요즘은 의사가 하루에 500m 이상 걷지 말라고 한다』고 말했다. 
  
  『결승 테이프가 걸려 있다면 터벅터벅 걸어서라도 도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환한 웃음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유롭게 걷지 못하는 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孫基禎은 자서전 끝에 이렇게 썼다   
  『이미 權泰夏 선배는 1971년에 65세의 생애를 마감했고, 金恩培 선배도 또한 1980년에 70세의 인생을 마쳤다. 나는 때때로 42.195km의 긴 마라톤 코스 위에 나 혼자만이 남은 것 같은 외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골을 향해 초조해할 것도 없겠다. 나를 위해 아직 결승 테이프가 걸려 있다면 터벅터벅 걸어서라도 도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 새삼 늙은 몸에 더 이상 채찍질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孫基禎은 2002년 11월15일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서울삼성병원에서 90세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유해는 그가 원했던 대로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南昇龍은 그보다 앞서 2001년 2월20일 89세를 일기로 他界했다.●

출처 : 평해손씨 화랑회
글쓴이 : 손범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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