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김삿갓
김삿갓, 본명 김병연
(1807~1863)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 안동
호 난고
별칭 속칭 김삿갓, 자 성심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경기 양주
주요저서<김립시집>
*김삿갓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父)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그의 자는 성심(性沈), 호는 난고(蘭皐) 또는 이명(而鳴-'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그의 내심을 암시한 것)이라 하였다.
김병연이 세상에서 본명이나 별호보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은 그의 출생배경과 성장 및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는 원래 양반 권세가문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811-1812년의 홍경래의 농민전쟁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가정적 비극을 겪게 된다. 즉, 그가 5살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 농민군 세력이 평안도 일대를 휩쓸게 되었을 때, 선천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농민군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당하였다.
이때 노복 김성수의 도움으로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공부하였다.
그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주죄(誅罪)의 형벌이 김익순에게 만 그치게 되고 멸족에서 폐족(천인)으로 사면되자 형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불과 1년만에 아버지 김안근이 화병으로 죽게 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가정내력을 숨기고 살았다.
그때 아무도 나이어린 그에게 김익순 이래의 가정내력을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김병연은 자신을 한 낱 몰락양반의 후예로만 알고 있었으며 청운을 품고 제자백가, 사기, 통감 등을 비롯하여 조선, 중국의 시문을 널리 통독하였으며 야심만만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김병연이 20세 되던 해에 영월고을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묘하게도 과거시제(科擧詩題)가 '정가산은 나라에 충절하여 순사하고, 김익순의 죄는 하늘에 닿는다.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였다.
자신이 역적 김익순의 손자임을 모르고 있던 그는 일필휘지하여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리오.' 이라는 글로 장원급제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양반사회의 멸시로 방황을 하다가 22세 되던 해에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두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길을 나섰다.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묶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 충청도, 경상도로 돌았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해 동안 훈장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둘째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 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만에 다시 찾아 온 둘째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심부름을 시킨 뒤 도망쳤고,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아들을 또다시 만나 귀향을 마음 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오냐, 알았다 하고 동행하여 돌아오다가, 잠시 뒤좀 보고 올테니 기다려라 하고는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보리밭 위로 삿갓이 보이기에 안심하고 기다렸던 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님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가 보았더니, 그때는 이미 삿갓만 남겨둔 채 시인은 사라진 뒤였었다.
간단한 우스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김삿갓은 어떤 한을 품고 일생을 방랑으로 일괄했던 것이다.
김병연은 57세때 전라도 땅 동복(同福)에서 객사하여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시신은 삿갓의 유언대로 젊은 시절 살던 영월 와석골에 둘째아들 익균에 의해 모셔 안장됐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畵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
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
인간에게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
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 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 기술은 이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 야유, 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의 생각, 행동은 그의 시 세계에서 엿볼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한 시의 마지막 문구가 인상에 남는다.
돌아가자니 그것도 어렵고, 머물러 있자니 역시 어렵기 때문에, 그 몇 날이고 방황하다가 길가에서 쓰러지게 된다고 체념했던 것이다.
인생을 영원한 우주의 역려(여인숙)로 본 시인에겐 당연한 귀결이지만...
술안주가 없을 때에는 사발에 거꾸로 뜬 청산 그림자가 좋다며 군 말없이 술을 든 주선, 그리고 시 한 수로 여자를 유혹했던 천하 한량...동시에 그는 언제나 민초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말없는 혁명가였다.
평생 술 없는 동네는 안 들렀던 그의 방랑도 그렇게 끝났다.
1978년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으며, 1987년 영월에 ‘전국 시가비 건립동호회 (全國 詩歌碑 建立 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