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인물들

손순효 [孫舜孝, 1427~1497]

초심방 2006. 9. 1. 11:44
손순효 [, 1427~1497]
요약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 평해()
물재() ·칠휴거사()
별칭 자 경보(), 시호 문정()
활동분야 정치
본문

본관 평해(). 자 경보(). 호 물재() ·칠휴거사(). 시호 문정(). 1453년(단종 1) 생원 때 증광문과()에, 1457년(세조 3) 문과중시()에 급제했다. 그 후 장령() 등을 거쳐 성종 때 전한() 겸 집의()로서 17항목의 정책을 상소, 채택되어 1471년(성종 2)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의 과오로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문관으로 복귀, 도승지 등을 지냈다. 윤비() 폐위 때는 그 부당함을 극간했다. 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1480년 중추부지사() 때 정조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이르렀다.

1485년 임사홍()을 두둔하다가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곧 우찬성이 되었으며 1487년 《식료찬요()》를 찬진()했다. 1496년(연산군 2) 중추부판사() 때 고령을 핑계, 사퇴를 청했으나 불허되고 궤장(几  )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밝고 《중용()》 《대학()》과 《역경()》에 정통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그림은 화죽()에 능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다.

 

1427(세종 9)~1497(연산군 3).

조선 초기의 문신.

손순효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본관은 평해.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 아버지는 군수 밀(密)이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시무책(時務策) 17조를 상소하여 채택되었으며, 그 공으로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를 저질렀다 하여 무관직인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뒤에 다시 문관직인 장례원판결사로 복귀하여 동부승지·도승지·강원도관찰사·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반대했다. 148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기도관찰사·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변론한 것이 화가 되어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곧 우찬성으로 복직되었으며,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여 〈대학〉·〈중용〉·〈주역〉에 정통했으며, 묵화에도 능했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식료찬요 食療撰要〉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물재집 勿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멋지게 술을 마신 인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문신 손순효(孫舜孝)가 꼽힌다. 명필가였던 그는 아무리 고주망태가 되어도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를 완벽하게 써냈다. 임금이었던 성종은 음주가 지나쳐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은잔을 내려보냈다. 대주가였던 그는 마음껏 이은술잔을 얇게 펴 최대한 늘려서 술을 실컷 마시며 호기를  펼쳤다. ▼자고로 음주문화는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가 마실 만큼 자신이 따라 마신다. 바로 `자작(自酌)문화'다. 구라파에서는 잔을 서로 맞대고 부딪친다. 건배를 즐기는 `대작(對酌)문화'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술잔을 주고받기를 즐긴다. 바로 `수작(酬酌)문화'다. 지구촌에서는 수작문화권의 나라가 흔치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공손하게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문화에 익숙지 못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수작문화의 연원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화랑들이 한솥의 차를 나누어 마시며 공생공사를 다진 차례(茶禮)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전쟁과 같이 목숨이 풍전등화격이었던 상황에 술잔을 주고받은 사기(史記)가 나와 피를 나누는 의식의 다름이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 전통사회에서는 관청에 대포(大匏)라는 큰 술잔을 비치해 날을 잡아 상하 차별없이 술잔을 돌려 마심으로써 일심동체를 다졌던 풍습이 있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술자리가 부쩍 늘고 술집마다 “부어라 마셔라”가 지천이다. 직장인들 사이에 그 여진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얼마 전에는 `술잔 돌리기'가 도마에 오르더니 올해는 주당들 사이에 `폭소클럽(폭탄주 소탕 클럽)'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여러 가지 토속주의 머리글자를 갖다 붙인 새로운 스타일의 `섞어주'가 개발돼 과음을 부추긴다. 이름도 `백두산' `소백산맥' `설산주'에서부터 `천국의 눈물'까지 별나다. 연말연시의 술자리와 시장 선점을 위한 주류업계 경쟁과 현실도피의 소산이 아니기를 바라게 된다. <金吉昭논설주간>

 

[이규태코너] 감성 경영
[조선일보 2003-09-30 17:18]

지금은 빌딩과 매연으로 시야가 막혀 있지만 옛날에는 경복궁에서 남산 자락이 훤하게 내다보였다.

저녁 무렵 성종(成宗)이 경회루 다락을 거닐고 있는데 남산 기슭에서 멍석 깔아놓고 술잔 주고받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상 손순효(孫舜孝) 집이 그 어름이란 것을 알고 있는 성종은 내시를 시켜 확인케 하였다.

돌아와서 손 대감이 막걸리를 바가지로 퍼 수작하는데 안주라고는 오이 조각 한 가지라고 아뢰자 술 한상 차려 내리라 분부하고 그 하사 때문에 내일 감사 입궐하지 말라고까지 분부했다. 군신 간의 정이 배어나오는 한폭 수채화 같은 장면이다. 세조 쿠데타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목숨과 바꾸며 완강히 저항했던 데는 불의에 대한 선비정신과 어린 임금을 지키라는 선왕의 고명(顧命) 말고도 문종(文宗)의 인간적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임금은 젊은 학사들의 침실을 야반에 들러 발로 차낸 이불을 덮어주고 술에 취해 청마루에 자고 있으면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귀물인 감귤을 한쟁반 내리는데 쟁반 바닥에 어시가 씌어 있어 신하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는 감성 경영의 제왕들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마지막 강적 장사성(張士誠)과 대진하고 있을 때 일이다. 적의 후방을 포위하고자 좁은 협곡길에 숨어들고 있는데 알을 품고 있는 오리 한 마리가 길을 막았다.

주원장은 진군을 포기하고 오리가 새끼를 낳을 때까지 10여일을 기다렸다. 업보(業報)를 믿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사이에 적의 부장(部將)들이 대거 투항해왔다. 그 큰 전쟁을 한낱 오리새끼의 생명 때문에 미루는 인정 많은 장수라면 그 휘하에 들어가는 편이 옳다고들 판단한 때문이었다.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명나라를 얻은 감성(感性) 리더십이다.

21세기 들어 미국의 경영 마인드가 계약적 이성(理性) 경영에서 인간적 감성(感性) 경영으로 달라지는 추세라 한다. 우리나라도 MBA마인드에 투철했던 CEO들이 이메일로 직원개개인과 마음을 트고 친필 편지를 띄우는가 하면 감명받은 책에 밑줄을 쳐 선물하고 1주일에 하루 출근시간을 스스로 정하게 하기도 한다.

오후 시간에 예술 관람을 하고 도시락 미팅으로 격의를 좁히는 등 감성 경영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양적 이성 경영에 한국적 감성 경영의 절충현상으로 주의를 끄는 새바람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