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이야기

[스크랩]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 황장봉산(黃腸封山) 동계(東界) 발견 관련 보도자료(2011. 9. 20.)

초심방 2011. 9. 25. 11:36

황장봉산(黃腸封山) 동계(東界) 발견

사단법인 울진숲길이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찬물내기 근처)에서 숲해설가 제보로 발견

 

 

* 문의 : 사단법인 울진숲길 사무국장 이규봉(017-532-3322)

 

 

 

 

1. 황장봉산 동계발견 경과

 

o 2011년 9월 14일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 숲해설가 전용운(두천리, 61세)씨가 바위에 한자가 쓰여 있음을 발견하고, 9월 15일 (사)울진숲길에 제보

o 2011년 9월 15일 (사)울진숲길에서 1차 조사, 황장봉산 경계 표석임을 확인

o 2011년 9월 19일 (사)울진숲길에서 지역사학연구가 윤현수씨, 울진군청 학예사 심현용씨 등과 함께 2차 조사

o 2011년 9월 20일 보도자료 배포

 

 

 

2. 황장봉산 동계 내용

 

“黃腸封山 황장봉산

東界鳥城 동계조성

至西二十里 지서이십리“

 

“황장봉산의 동쪽 경계는 조성(鳥城, 안일왕 산성으로 추정, 암각 지점이 안일왕산 바로 아래이며, 조령 초입)이며,

황장봉산은 조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십리에 이른다.”  

 

 

3. 황장봉산 동계 조사 결과

 

1) 위치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두천1리에서 소광2리) 찬물내기 쉼터(소광리)에서 두천방향으로 100여미터 거리 숲길옆 암벽으로 암벽은 북서에서 남동향임

2) 글자쓰인 면의 크기

높이 130cm, 넓이 250cm의 반달모양 편평한 바위

 

3) 글자 크기

큰 것은 가로 15cm, 세로 20cm

작은 것은 가로 8cm, 세로 3cm

 

4) 명문수

세로 3행에 총 13자

1행 4자

2행 4자

3행 5자

 

5) 글자 음각 깊이

5mm 내외

 

 

 

4. 황장봉산 동계 발견의 의미

 

o 황장목은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소나무 관곽재를 말한다. 세종실록(1440년)에는 천자의 곽은 황장으로 속을 하고,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지인 소광리 일대가 조선 숙종때부터 황장봉계로 관리되어 온 것은 울진금강소나무의 우수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o 다른 지역은 주로 황장금표가 발견되었지만, 울진 소광리는 황장봉표가 발견된 점은 조선 왕조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지역에 이렇게 두 개의 황장봉표가 발견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이다.

 

o 이번 황장봉산 동계의 발견으로 울진 소광리 일대 황장봉산의 경계와 범위가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o 조성(鳥城)은 안일왕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울진에서는 처음 나온 산성의 이름이다. 그동안 안일왕산의 산성을 안일왕산성으로 불리어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조성(鳥城)으로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o 소광리 일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동계뿐만 아니고 서계, 북계 등도 있을 수 있기에 이는 숙제로 남는다.

 

 

 

 

5. 황장봉산 동계 사진

 

 

 

 

 

 

 

 

 

 

 

 

 

 

 

 

6. 참고자료

 

[기존 소광리 황장봉계표석(蔚珍召光里黃腸封界標石)]

 

 

 

o 위치 :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 262번지

 

o 시기 : 조선시대

 

o 문화재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1994년 9월 29일 지정

 

o 내용[자료출처 울진문화원]

 

이 표석은 울진-봉화간 36번 국도상 광천교에서 6.2km 들어간 대광천 계곡과 도로 변에 연접한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 봉산(封山)의 경계를 표시한 표지석이다.

황장목(黃腸木)은 금강송(金剛松), 강송(剛松), 춘양목(春陽木), 춘향목(春香木), 미인송(美人松), 적송(赤松), 직송(直松)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황장목은 견고하여 왕실에서 관곽(棺槨)으로 사용하였으므로 황장목이 있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금산(禁山)으로 지정하여 서민들이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의례에 필요한 자원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기 위한 왕권강화의 한 방편이었다.

황장목에 대한 기록은 조선초기부터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전기까지는 황장목이 있는 산림을 금산(禁山)으로 금양(禁養)하였으나 황장봉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봉산에 대한 기록은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봉산에 실화(失火)했을 때의 처벌규정으로 처음 나타나는데, 1699년의 것이므로 봉산제(封山制)는 이때보다 전에 시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교집록(受敎輯錄)』에 1684년 의송산(宜松山)의 봉목(封木)과 1689년 황장산(黃腸山)의 봉목에 대한 기록을 볼 때 이보다 앞서 봉산제가 확립되었을 것이다.

황장봉산제도가 시작되는 것은 1680년(조선 숙종 6)으로 안동, 봉화, 예천에 황장봉산이 처음 정해지는데, 울진 소광리의 황장봉산도 이때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이 제도는 양질의 소나무인 황장목을 확보하기 위해 황장목이 있는 지역을 봉산(封山)’이라 지정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던 일종의 산림보호 정책이었다.

 

이 표석은 자연석 바위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명문은 6행 23자로 음각되어 있으며, 글자크기는 대체로 8cm이다. 내용은 황장목의 봉계지역을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의 네 지역으로 하고 이 지역을 명길(命吉)이란 산지기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黃腸封/ 界地名生達/ 峴安一王山/ 大里堂城/ 四回/ 山直命吉

이러한 성격의 표석으로는 지금까지 발견된 원주 구룡산 입구, 임제군 한계리, 영월군 황장골 등지의 표석보다 훨씬 시기가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사회적기업 (사)울진숲길
글쓴이 : 금강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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