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계유고<鵝溪遺稿>의 저자 이산해(李山海)는?
이산해는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 부제학 .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처 52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하여 어가가 의주로 몽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이 일로 개성에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평양에 가서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당시 강원도 평해(平海)에 귀양을 오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54세였다.
평해에서의 유배생활 3년은 이산해에게 있어 문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역사가들은 평하는데. 그의 저서인 아계유고(鵝溪遺稿)에 실려 있는 시 840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이 기간에 지어진 것이거니와, “그의 시는, 초년에 당시(唐詩)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 허균(許筠)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57세 때 사면된 그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61세 때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모든 공직을 사퇴. 충남(忠南) 신창(新昌) 시전촌(枾田村)으로 내려가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선조가 승하하자, 그는 70세의 고령임에도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지문(誌文)을 짓고, 국정을 정권의 이양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 평소 장래가 촉망되던 둘째 손자 구(久)가 요서(夭逝)하자 이에 총격을 받아 지병이 악화, 서울 장통방(長通坊)에서 71세의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아계유고 제3권에 기성록(箕城綠) 잡저(雜著) 달촌기(達村記). 정명촌기(正明村記). 울릉도설(鬱陵島說). 사동기(沙銅記). 오곡연당기(梧谷蓮塘記). 팔선대기(八仙臺記). 응암기(鷹巖記). 황보촌기(黃保村記). 마암기(馬巖記). 우암기(牛巖記). 다천기(茶川記). 해월헌기(海月軒記). 안당장전(安堂長傳). 안효자전(安孝子傳). 안주부전(安主簿傳). 월송정기(越松亭記). 곡두기(鵠頭記). 해빈단호기(海濱蜑戶記). 망양정기(望洋亭記). 서촌기(西村記). 증옥보상인서(贈玉寶上人序).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유광흥사기(遊廣興寺記). 유선암사기(遊仙巖寺記). 유백암사기(遊白巖寺記). 김원성전(金原城傳). 죽봉기(竹棚記). 순리전(循吏傳). 기성풍토기(箕城風土記). 현제 위치는 울진군 기성면 황보에 이산해(李山海)유배지다.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황보 촌에서 서쪽으로는 골이 깊고 넓으며 산이 에워싸고 겹쳐 있다. 여기서 4.5리를 가서 재 하나를 넘으면 조금 남쪽으로 깊고 긴 골짜기가 있고. 길이 점차 높아져 산허리를 휘감고서 올라가 정성(頂上) 부근에서 그처는데. 바로 이곳에 수진사(修眞寺)가 있다.
절에는 법당과 좌우 승당(승당)이 있으며 법당 곁에는 동서로 두 요사 채가 있는데. 서쪽의 것은 새로 창건하였고 동쪽의 것은 건물만 세우고 아직 지붕을 얹지 못했다. 뜰에는 부서진 탑이 겨우 몇 자 높이로 서 있고 중은(스님)의 겨우 십여 명이다. 절을 둘러싼 것은 모두 감나무. 밤나무. 모과나무이고. 절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절 우측에는 개울이 흐르는데 푸른빛이 돌고 맑지는 않다. 절은 좌측으로 창해(滄海)를 굽어보고 있어 해와 달이 돋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구름이 걷혀 바다가 쾌청하면 멀리 울릉도를 명료히 볼 수 있다. 지세는 북쪽은 가려지고 남쪽은 트였으며 못 산봉우리들이 비늘처럼 촘촘히 늘어서 모두 산문(山門)을 향한 채 둘러싸고 있다.
절은 비록 경관이 유달리 뛰어나진 않지만 산의 정산. 골이 깊은 곳에 자리하여 속이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다. 매양 석양이 서산에 저 골짜기가 어두워지면 새들은 날들은 날아 자취를 감추고 흰 구름은 처마에 깃들며 범패(梵唄)는 멎고 중들은 잠들어 방장실(方丈室)이 적요하기만 한데. 별빛과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여 동구(洞口)는 대낮같이 밝고 싸늘히 내리는 이슬에 나무 그림자는 너울거리며 한 소리 풍경(風磬)에 만념(萬念)이 모두 텅 비니. 이것이 산방(山房)의 빼어난 흥치라 하겠다.
폭건(幅巾)을 쓰고 려장(藜杖)을 짚고서 날마다 노닐고 묵으며 돌아갈 줄 모르는 이는 누가인가. 죽피옹(竹皮翁)이다. 그를 따르는 이는 누구인가. 그의 두 아들이다. 손이 오면 반가이 맞이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절의 승려 수인(守仁)이다.
편집자 후포역사연구회 부회장 신 진 철
이산해는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 부제학 .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처 52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하여 어가가 의주로 몽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이 일로 개성에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평양에 가서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당시 강원도 평해(平海)에 귀양을 오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54세였다.
평해에서의 유배생활 3년은 이산해에게 있어 문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역사가들은 평하는데. 그의 저서인 아계유고(鵝溪遺稿)에 실려 있는 시 840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이 기간에 지어진 것이거니와, “그의 시는, 초년에 당시(唐詩)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 허균(許筠)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57세 때 사면된 그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61세 때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모든 공직을 사퇴. 충남(忠南) 신창(新昌) 시전촌(枾田村)으로 내려가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선조가 승하하자, 그는 70세의 고령임에도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지문(誌文)을 짓고, 국정을 정권의 이양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 평소 장래가 촉망되던 둘째 손자 구(久)가 요서(夭逝)하자 이에 총격을 받아 지병이 악화, 서울 장통방(長通坊)에서 71세의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아계유고 제3권에 기성록(箕城綠) 잡저(雜著) 달촌기(達村記). 정명촌기(正明村記). 울릉도설(鬱陵島說). 사동기(沙銅記). 오곡연당기(梧谷蓮塘記). 팔선대기(八仙臺記). 응암기(鷹巖記). 황보촌기(黃保村記). 마암기(馬巖記). 우암기(牛巖記). 다천기(茶川記). 해월헌기(海月軒記). 안당장전(安堂長傳). 안효자전(安孝子傳). 안주부전(安主簿傳). 월송정기(越松亭記). 곡두기(鵠頭記). 해빈단호기(海濱蜑戶記). 망양정기(望洋亭記). 서촌기(西村記). 증옥보상인서(贈玉寶上人序).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유광흥사기(遊廣興寺記). 유선암사기(遊仙巖寺記). 유백암사기(遊白巖寺記). 김원성전(金原城傳). 죽봉기(竹棚記). 순리전(循吏傳). 기성풍토기(箕城風土記). 현제 위치는 울진군 기성면 황보에 이산해(李山海)유배지다.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황보 촌에서 서쪽으로는 골이 깊고 넓으며 산이 에워싸고 겹쳐 있다. 여기서 4.5리를 가서 재 하나를 넘으면 조금 남쪽으로 깊고 긴 골짜기가 있고. 길이 점차 높아져 산허리를 휘감고서 올라가 정성(頂上) 부근에서 그처는데. 바로 이곳에 수진사(修眞寺)가 있다.
절에는 법당과 좌우 승당(승당)이 있으며 법당 곁에는 동서로 두 요사 채가 있는데. 서쪽의 것은 새로 창건하였고 동쪽의 것은 건물만 세우고 아직 지붕을 얹지 못했다. 뜰에는 부서진 탑이 겨우 몇 자 높이로 서 있고 중은(스님)의 겨우 십여 명이다. 절을 둘러싼 것은 모두 감나무. 밤나무. 모과나무이고. 절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절 우측에는 개울이 흐르는데 푸른빛이 돌고 맑지는 않다. 절은 좌측으로 창해(滄海)를 굽어보고 있어 해와 달이 돋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구름이 걷혀 바다가 쾌청하면 멀리 울릉도를 명료히 볼 수 있다. 지세는 북쪽은 가려지고 남쪽은 트였으며 못 산봉우리들이 비늘처럼 촘촘히 늘어서 모두 산문(山門)을 향한 채 둘러싸고 있다.
절은 비록 경관이 유달리 뛰어나진 않지만 산의 정산. 골이 깊은 곳에 자리하여 속이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다. 매양 석양이 서산에 저 골짜기가 어두워지면 새들은 날들은 날아 자취를 감추고 흰 구름은 처마에 깃들며 범패(梵唄)는 멎고 중들은 잠들어 방장실(方丈室)이 적요하기만 한데. 별빛과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여 동구(洞口)는 대낮같이 밝고 싸늘히 내리는 이슬에 나무 그림자는 너울거리며 한 소리 풍경(風磬)에 만념(萬念)이 모두 텅 비니. 이것이 산방(山房)의 빼어난 흥치라 하겠다.
폭건(幅巾)을 쓰고 려장(藜杖)을 짚고서 날마다 노닐고 묵으며 돌아갈 줄 모르는 이는 누가인가. 죽피옹(竹皮翁)이다. 그를 따르는 이는 누구인가. 그의 두 아들이다. 손이 오면 반가이 맞이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절의 승려 수인(守仁)이다.
편집자 후포역사연구회 부회장 신 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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