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간호사가 의사·딸 노릇 다해, 고맙고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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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꼭 챙겨 드세요
"할머니 계세요. 저 왔어요. 문열어주세요." 금정구 서4동의 한 이층주택. 양 간호사가 큰 소리로 부른다. 줄이 움직이며 문이 열린다. "할머니가 움직이기 힘드셔서 이렇게 줄로 연결해서 여는 겁니다." 양 간호사가 설명한다.
마당을 지나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방 한칸이 나온다. 냉기가 도는 방에서 유은채(88) 할머니가 일행을 반긴다. 천장 한쪽 벽지가 떨어져 있다. 할머니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할머니는 고혈압 환자다. 움직이다 넘어져 허리까지 다쳤다. 양 간호사가 천으로 만든 미니 약장을 내놓았다. "간호사협회에서 몇개 만든 게 있어 가져왔어요. 이거 붙여놓고 시간 맞춰 약 챙겨드세요." 그의 말에 할머니는 "이렇게 잘 돌봐줘서 너무 고마워…"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할머니의 혈압과 혈당을 체크한다. 혈압은 135에 80. 정상이다. 약을 제때 복용하고 있다고 판단한 양 간호사는 혈당을 재본다. 140이 나왔다. "다 괜찮네요. 이대로 유지하면 문제될 거 없어요."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숙제를 잘 한 학생같이. "음식은 꼭 싱겁게 드셔야 해요." 양 간호사가 한번 더 다짐을 받는다.
이날은 물리치료사 이종규(30)씨가 양 간호사를 따라 나섰다. 아침에 전화했을 때 할머니가 왼쪽 옆구리가 많이 결리다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보름 정도 됐어. 기침을 해도 아파." 이 씨가 할머니의 등을 이곳저곳 만져본다. 지압과 근육마사지를 해주는 것이다. 이어 전기치료를 시작했다.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드네." 할머니는 의료보호대상이어서 치료비와 약값은 많이 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전기치료가 끝나자 이씨가 운동요법을 가르쳐 준다. "누운 상태에서 손깍지를 낀 채로 팔을 들어올리고 열까지 헤아린 뒤 천천히 내리세요. 아침 저녁으로 20번 정도 하시면 좋아질 겁니다." "꼭 하셔야 합니다. 제가 확인할 거에요." 옆에서 지켜보던 양 간호사가 한마디 한다.
양 간호사는 할머니의 생활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챙긴다. 필요할 경우 자원봉사자에게 목욕이나 머리감기기도 요청한다. 냉방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를 보다못해 전기장판에 깔 담요도 갖다 드렸다. 이날은 쿨파스와 로션형 파스를 준비했다. 선물을 받아든 할머니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렇게 신세를 안져야 하는데…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양 간호사가 내 딸 노릇을 다하네. 기자 양반,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 분들 크게 써줘." 몸 아프고, 정에 굶주린 할머니가 양 간호사와 이씨의 손을 잡고 연신 쓰다듬는다. "저희가 할 일인데요, 뭘. 더 자주 찾아뵙고 돌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양 간호사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부양가족 있다고 기초생활 수급권자도 안돼
유은채 할머니 집을 나선 양 간호사는 인근 서3동 달동네로 향했다. 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다. 벨도 없는 한 연립주택. 한참 두드리자 문이 열린다. 조인수(73)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다. 하루 네 차례 복막 투석을 하고 이틀에 한 번은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
방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너무 춥다. 이런 곳에서 환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기장판도 온기가 거의 없다. 전기값을 아끼기 위해서란다. "할아버지는 관절도 안좋으세요.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데 도와줄 수 없으니 너무 안타까워요." 양 간호사가 울상을 짓는다. "힘들 게 뭐 있나, 이렇게 살다 가는거지."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는데 도와주는 가족이 없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대뜸 "나에게는 혈육이 없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라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옆에서 혈압을 재던 양 간호사가 "역정을 내면 안된다"며 주의를 주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가족이 있다는 것 때문에 혜택을 보지 못했다. 7년전 발병한 만성신부전증을 치료하는 데 집 한 채를 날려버렸다. 한달에 약값만 31만 원이나 드는데 일을 하지 못하니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가족과 연을 끊었다. 아니 이혼당하고 하나 있는 자식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버지를 떠나 아예 이사를 가버렸다. "평생 치료해야 하는 병을 얻으니까 그런거지. 일도 못하고 돈을 못 버니 당연한 거 아니야."
그렇지만 당국은 부양가족이 있다며 혜택 주기를 거부하다 사정을 알고는 차상위계층으로 인정해줬다. 병원비라도 해결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으니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이를 본 양 간호사가 나섰다. 복지관에 이 사실을 알려 할아버지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일주일에 5일간 도시락을 받게 된 것이다.
비록 한끼지만 할아버지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염치를 무릅쓰고 친구집에 가서 끼니를 때운다. 도우미가 와서 반찬도 해주고 청소, 빨래를 해주는 것도 눈물겹게 고맙다.
양 간호사가 파스 등을 내놓자 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은 없다"며 굵은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국제신문 최원열 기자 cwyeol@kookje.co.kr / 노컷뉴스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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