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동대구∼경주∼울산∼부산)이 내달 1일 개통되면 신라의 고도 경주가 더욱 가까워진다. 서울역에서 342.1㎞ 떨어진 신경주역까지 KTX로 1시간55분. 동대구에서 일반열차나 버스로 갈아타는 불편도 덜고 시간도 1∼2시간 단축돼 당일관광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시승열차를 타고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가는 경주로 나들이를 떠나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주에도 정선의 민둥산 못지않은 억새군락이 있다. 무장봉 정상을 하얗게 채색한 억새군락은 148만㎡로 민둥산의 3배가 넘는 규모. 정상에 오르면 광활한 억새군락지 너머로 멀리 포항의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장봉 억새군락지로 가는 길은 추색이 완연한다. 추수가 시작된 선덕여왕릉과 진평왕릉 사이의 황금들판을 가로지르면 보문호의 벚나무 가로수 잎이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이 되어 포도를 뒹군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암곡동까지는 고즈넉한 산길과 조붓한 마을길의 연속. 화려한 보문관광단지 옆에 이처럼 소박한 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길은 정감이 넘친다.
산행 들머리인 암곡동 주차장에서 무장봉 정상까지는 5.7㎞ 거리. 산행로는 무장봉 정상 아래까지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덕동천을 거슬러 오른다. 숲은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얼마나 숲이 짙었으면 암곡(暗谷)이라는 지명이 붙었을까. 개울을 몇 차례 건너고 호흡이 거칠어질 무렵에 무장봉과 무장사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무심한 산행객들은 삼거리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건너 100m 남짓한 곳에 위치한 무장사지를 그냥 지나친다. 경주의 문화재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다 무장사지는 폐사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장사의 내력을 알게 되면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는 태종 무열왕(김춘추)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암곡동 골짜기에 묻었다고 전한다.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마감하고 병기가 필요 없는 평화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훗날 이곳에 사찰이 들어서자 병기와 투구를 묻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무장사(명現?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전쟁 중에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이 병기와 투구를 묻은 주인공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했다’는 문무왕 관련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헛되이 사람을 고되게 한다며 동산처럼 큰 왕릉을 거부하고 죽어서 호국용이 되겠노라며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한 줌 재가 된 문무왕은 동해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태평성대를 위해 온몸으로 거친 파도를 막아내고 있다.
숲 속은 의외로 넓고 고즈넉하다. 지금은 깨진 비석받침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삼층석탑 하나가 드넓은 숲 속을 지키고 있을 뿐 병기와 투구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무너진 채 숲 속을 뒹굴던 석탑은 1963년에 일부 부재를 보충해 다시 세웠지만 쓸쓸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억새로 뒤덮인 무장봉은 무장사지에서 3.1㎞를 더 올라야 만난다. 길은 가파른 곳이 거의 없어 동네 뒷산처럼 아늑하고 수더분하다. 하지만 계곡의 바위와 소(沼)는 해발 1000m급 명산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11월에는 심신조차 울긋불긋 단풍이 든다.
갑자기 하늘이 확 트이면서 억새군락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억새밭은 순백의 물감으로 채색된 한 폭의 수채화나 다름없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른 키보다 높게 자란 억새가 새하얀 꽃을 피운 풍경은 황홀하다 못해 몽환적이다. 바람이 잡은 지휘봉에 따라 하늘하늘 춤을 추는 억새군락 사이로 사라지는 울긋불긋한 차림의 산행객들이 꿈을 꾸는 듯하다.
동대봉산(660m)의 한 봉우리인 무장봉(624m)은 본래 억새군락지가 아니었다. 1970년대 초 동양그룹이 이곳에 오리온목장을 조성해 운영했으나 80년대 비업무용 토지 강제 매각조치에 따라 축산회사에 매각됐다. 이 목장이 1996년 문을 닫은 후 방치되면서 억새가 돋아나기 시작해 무장봉은 어느새 전국 최고의 억새군락지로 거듭났다.
무장봉은 정상에서의 경관도 빼어나다. 발아래로 보문단지와 포항의 영일만이 보이고, 저 멀리 토함산 단석산 함월산 운제산 등 경주와 포항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산수화를 그린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드라마 ‘선덕여왕’이 촬영되는 등 무장봉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미술사 연구의 태두로 꼽히는 우현 고유섭 선생은 1940년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一節)’에서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고 권했다. 살아서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죽어서 해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바다에 묻힌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새겨보라는 뜻이다. 평화시대를 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암곡동 골짜기와 평화를 상징하는 억새가 춤을 추는 무장봉. 이곳이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보는 그곳이 아닐까.
경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